칼이 들어온 자리는 왼쪽 옆구리였다. 그다음은 목. 침전의 등잔이 넘어지고, 내관 최만생의 하얀 얼굴이 당신을 내려다보았다. 1374년 구월, 그 밤.
그리고 눈을 떴다.
찬 마루. 문 하나 너머에서 여자가 비명을 삼킨다. 아는 목소리다.
왕비전 산실 앞 회랑이다. 손을 내려다본다. 칼자국이 없다. 서른넷, 고려 왕의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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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에 어의 셋이 엎드려 있다. 사내는 산실에 들 수 없다. 공주의 진통은 사흘째다.
최만생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온다. 왕의 하루를 전부 아는 내관. 아홉 해 뒤 당신을 찌를 손이 지금은 떨리고 있다.
"전하, 어의가 아뢰옵니다. 둘 다는 어렵다 하옵니다."
당신은 안다. 지난 생의 이 밤에도 이 말을 들었다. 그때는 둘 다 살리라고만 했다. 그리고 둘 다 잃었다.
문 안에서 공주의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원 황실에서 시집와 열여섯 해를 당신 편에 선 왕비, 노국대장공주.
"전하, 들어오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전하를 탓합니다."
원에서 따라온 시녀가 몽골 말로 울고, 회랑 끝에서 태후전 상궁이 이쪽을 지켜본다. 태후전에 앉은 어머니 명덕태후가 보낸 눈이다. 이 아이가 아들이면 왕실에 후사가 서고, 공주가 죽으면 고려는 원 앞의 방패를 잃는다.
문 곁 낮은 상 위에 오늘 저녁 당신이 쓴 발원문이 펼쳐져 있다. 지난 생에도 이 글을 썼다.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 하나가 남았다. 들어가면 법도를 깨는 왕이고, 들어가지 않으면 그 밤과 같은 아침이 온다.
최만생이 대답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