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꺼풀이 열리는 데 한참 걸린다. 천장에는 형광등 대신 낮게 깎은 간접등. 머리맡 기계가 한 박자씩 운다. 목 안이 모래처럼 말라 있고, 손가락을 움직이자 손등의 바늘이 당긴다.
누군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
침대 옆 의자에서 흰 가운의 남자가 일어서 있다. 눈이 붉다. 손에 든 낡은 녹음기에서 빨간 불이 아직 깜빡인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움직이지 마세요. 주치의 서이헌입니다. 제 목소리 들리시면 눈만 한 번 감았다 뜨세요."
그가 당신 손목을 쥔다. 맥을 세는 손가락은 찬데, 그 끝이 떨린다. 그는 손목시계를 보고 차트에 적는다. 2029년 4월 16일 03시 12분. 차트 맨 위 입원일 칸에는 2026년 4월 4일. 결혼식을 3주 앞두고, 약혼자가 몰던 차가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은 그날 밤이다. 당신은 조수석에 있었다. 3년이 지났다.
문이 벌컥 열린다. 검은 정장의 거구가 들어와 문을 등지고 선다. 귀에 꽂은 이어피스, 왼쪽 눈썹을 가르는 흉터. 나라가 당신에게 붙인 경호팀장 차무진. 2년 동안 이 문밖에만 서 있던 남자가 문 안쪽에 선 것은 처음이다. 환자복 깃 아래 드러난 당신 쇄골에 눈이 닿자, 그의 숨이 멎는다.
"상황 1호. 깨어났다. 20층 봉쇄. 엘리베이터 잠가."
블라인드 틈으로 창밖이 보인다. 새벽 세 시인데 아래 광장에 촛불이 수천 개다. 촛불을 든 사람은 전부 남자다. 그 위로 거대한 현수막이 흔들린다. 3년 전 당신의 증명사진이다.
«잠든 공주여, 인류를 깨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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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단 문이 쾅 열리고, 회색 쓰리피스 정장의 남자가 숨을 몰아쉬며 들어선다. 엘리베이터가 잠겨 스무 층을 걸어 올라온 얼굴이다. 정부에서 나온 사람. 인류의 대가 끊기지 않게 하려고 만든 기관, 존속청의 차장 민태겸이다. 그는 숨을 고르기도 전에 서류철을 연다.
"깨어나신 걸 환영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순서를 건너뛰겠습니다. 3년 사이 X열이라는 병이 돌았습니다. 여자만 죽이는 병입니다. 지금 이 지구에 살아 있는 여자는 한 분뿐입니다. 채이 씨입니다."
"채이 씨 피에만 그 병을 막는 항체가 있습니다. 채이 씨 몸에서 자란 아이만 살아서 태어납니다. 그러니 인류의 다음 아이는 채이 씨의 임신 하나뿐입니다. 아이 아버지는 채이 씨가 직접 고르십니다. 고른 남자는 30일 동안 채이 씨와 한집에 삽니다. 법은 그 남자를 지정자라고 부릅니다."
서이헌이 서류철과 침대 사이로 몸을 밀어 넣는다. 그의 가운 자락이 당신 손등을 덮는다.
"차장님. 깨어난 지 4분입니다."
"압니다. 그런데 30일 안에 첫 지정자가 없으면, 유엔이 채이 씨를 제네바로 옮길지 표결합니다. 가결되면 채이 씨는 여러 나라가 함께 관리합니다. 오늘이 그 30일의 첫날입니다."
민태겸의 휴대폰이 진동한다. 화면을 본 그의 입술이 얇아진다.
"미국 대사관입니다. 벌써 알았군요."
차무진의 무전이 연달아 울린다. 광장 쪽에서 함성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처음엔 몇 사람, 곧 수천의 목소리로.
"새어 나갔습니다. 15분이면 광장이 열 배가 됩니다."
민태겸이 만년필을 이불 위, 당신 손 옆에 내려놓는다.
"서명은 나중에 하셔도 됩니다. 대신 첫 질문에는 지금 답해 주십시오. 15분 뒤면 이 층 앞이 기자로 막힙니다. 누구를 먼저 올려 보낼까요. 망원동에서 오고 계신 아버님입니까, 약혼자 한지후 씨입니까."
서이헌의 녹음기는 아직 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