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소 문이 열리고 찬바람이 든다. 내관도 앞세우지 않고 들어온 사람은 왕이다.
당신의 지아비, 왕 이순이 당신 앞에 선다. 손에 상소 한 장이 구겨져 있다. 조정을 쥔 당파 서인의 영수, 송시열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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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빈. 저 늙은이가 우리 아들을 맏아들로 세우기엔 너무 이르다 하오. 세운 지 스무 날 만에."
스무 날 전 왕은 석 달 된 당신의 아들을 원자로 정했다. 왕의 맏아들, 다음 왕이 될 자리다. 며칠 뒤 당신은 희빈이 되었다.
방 한쪽 요람에서 원자가 칭얼댄다.
당신은 이 밤을 안다. 한 번 살았다. 열두 해 뒤 이 남자가 내린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눈을 떠 보니 열두 해 전, 오늘 저녁이었다.
"중전이 아직 젊으니 중전의 아들을 기다리자는 말이오. 기다리면, 중전이 낳기라도 한다는 게요?"
궁녀 숙정이 등잔 심지를 돋우다 손을 멈춘다. 처소에서 당신을 모시는 아이다. 마마의 얼굴만 본다.
지난 생의 이 밤, 당신은 그에게 말했다. 저 늙은이를 용서하지 마시라고. 그 말 한마디로 서인이 쓸려 나갔고, 송시열이 죽었고, 중전 민씨가 쫓겨났고, 당신이 중전이 되었다. 그리고 다섯 해 뒤 쫓겨난 이들이 돌아와 당신을 끌어내렸다.
이순이 상소를 촛불 가까이 들이민다. 종이 끝이 그을린다.
"말해 보오. 이 글을 어찌하면 좋겠소. 그대 말대로 하리다."
요람 쪽에서 원자가 다시 칭얼댄다. 이 남자는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그대로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