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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뽑히는 소리가 성인식 축배를 찢었다.
당신의 두 이복형이 잔을 내던지고 칼을 뽑는다. 은빛 갑옷의 기사들이 그보다 빨랐다. 칼등이 두 사람의 머리를 내리치고, 형들이 연회 식탁 위로 쓰러진다. 촛대가 굴러떨어지고 하객석에서 비명이 터진다. 아버지 하르트 백작이 무릎을 꿇는다.
그 한가운데서 금테 안경의 남자가 서류 한 장을 펼쳐 든다. 아이젠 공작가 차남, 왕국 법무관. 당신 약혼녀의 오빠 크리스토프 폰 아이젠이다.
"하르트 백작가. 마석 거래 장부 위조와 왕실 기만. 반역죄 제14조 2항에 의거해 작위와 영지를 박탈합니다. 광산은 오늘부로 압류합니다."
그 순간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서울의 밤거리. 지하철 손잡이. 휴대폰 불빛. 어느 겨울 새벽, 횡단보도로 덮쳐 오는 헤드라이트.
전생이다. 당신은 한국에서 살다 죽은 사람이었다. 몸 어딘가에 새겨진 문양 하나가 불에 덴 듯 타오르고, 눈앞에 글자가 떠오른다.
시야가 바뀐다. 크리스토프의 몸 위로 푸른 빛이 겹친다. 하르트 핏줄의 «감정(鑑定)의 눈». 서자에게는 안 뜬다던 그 눈이 지금 처음 떠졌다. 저 남자는 «같은 쪽 사람», 먼저 온 전생자다.
크리스토프가 당신 앞으로 걸어온다. 기사들이 길을 연다. 키가 엇비슷해 허리를 숙일 것도 없이, 그가 고개만 기울여 당신 귀에만 들리게 말한다. 한국어로. 이 세계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당신 얼굴을 살피며.
"이 집안 눈이 문제였어. 우리 같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 근데 서자는 그 눈이 안 뜬다더라."
"혹시 알아듣는 거면 표정 관리 잘해. 알아들으면 너도 오늘 같이 끝나는 거야."
기사들은 무슨 말인지 몰라 멈춰 서 있다. 이 방에서 그와 당신만 아는 말이다. 저 남자가 무엇을 숨기는지 캐물을 수 있는 유일한 말이기도 하다.
그가 몸을 편다. 다시 이 세계의 말로.
"서자는 해당 없습니다. 오늘 밤 안에 영지를 떠나면 됩니다. 백작과 두 아들은 왕도로. 처결은 6월 1일 귀족 회의에서. 서자가 나라 밖으로 달아나면 그날을 기다릴 것도 없습니다."
기사들이 아버지와 쓰러진 형들을 끌어낸다. 아버지가 문턱에서 당신을 돌아본다. 소리 없이 입 모양만 움직인다. 광산. 장부.
진홍 드레스가 하객석을 박차고 뛰어나온다. 당신과 동갑인 스무 살 약혼녀, 공작가 막내딸 이졸데다. 오늘 받은 약혼 반지를 낀 손이 당신 소매를 움켜쥔다. 숨이 닿을 만큼 가깝다.
"오라버니, 이게 무슨 짓이에요. 오늘은 이 사람 성인식이라고요!"
"저는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이리 와라, 이졸데. 서자가 공작가 영애를 데려가면 그건 납치다. 그땐 내가 직접 수배지를 붙인다."
반대쪽 팔을 리네트가 붙잡는다. 어머니를 잃은 당신을 대신 키운 엘프 하녀장이다. 열쇠 꾸러미를 움켜쥔 채 당신 귀에 입술을 댄다. 스무 해 동안 도련님이라 부르던 그녀가 처음으로 다른 호칭을 고른다.
"정문으로 나가시면 저 검은 옷이 따라붙습니다. 벽난로 뒤에 통로가 있습니다.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 주인님."
연회장 기둥 그늘에서 검은 옷의 여자가 아까부터 당신만 보고 있다. 짧은 흑단발 아래 붉은 눈, 높은 깃의 검은 경갑. 교회 정화대의 칼이다. 정화대는 전생자로 확인된 자를 그 자리에서 죽인다. 그녀의 손끝에 단검이 걸려 있다.
두 여자가 붙든 양팔 아래에서 문양이 뜨겁게 맥박친다. 이 성에서 나갈 시간은 오늘 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