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회의실 블라인드가 전부 내려가 있다. 문에는 «사용 중» 팻말.
어제 이 방에서, 변상혁 팀장은 당신 기획안을 반으로 찢었다. 팀원 다섯이 보는 앞에서. «이따위 걸 광고주한테 보여 줄 생각이었어?»
그 변상혁이 지금 당신 구두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이미지 불러오는 중…
아침 9시 12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변상혁. 오늘 하루,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당신에게는 그런 힘이 있다. 하루에 한 명. 이름을 부르고 명령하면, 그 남자는 자정까지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자정이 지나면 그에게 오늘은 통째로 빈칸이 된다. 아무도 모른다. 당신만 안다.
그래서 그는 시키는 대로 했다. 커피를 타 왔고, 찢은 기획안을 테이프로 한 장씩 붙였고, 지금은 회의실 카펫 위를 무릎으로 긴다. 당신이 «됐다»고 할 때까지.
테이블 위, 테이프 자국이 난 기획안 표지에서 광고 모델이 웃고 있다. 설휘. 아이돌 출신 배우. 그리고 1505호, 당신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남자. 엘리베이터에서 한 번도 먼저 인사한 적이 없다.
넥타이가 바닥에 끌린다. 커프스 단추 하나가 풀려 있다. 숨이 거칠다. 그런데 눈이 이상하다. 굴욕에 젖은 눈이 아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이다.
"…다음은. 다음은 뭘 하면 됩니까."
존댓말이다. 입사 4년 만에 처음 듣는 그의 존댓말.
변상혁의 휴대폰이 카펫 위에서 진동한다. 사내 메신저 미리보기.
«[본부장실] 11:00 클리어 제로 PT, 남궁 본부장님 직접 참관. 2팀 준비 바람.»
남궁찬. 그룹 회장의 손자이자 이 회사의 본부장. 입사 4년 동안 당신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늘 «거기»였다. 그가 10분 뒤에 이 방으로 온다.
그때 당신 휴대폰이 울린다. 화면에 뜬 이름에 숨이 멎는다. 염주한.
3년을 만났고, «넌 나한테 과분하지 않아» 한마디로 당신을 버린 남자. 그가 떠나던 밤, 당신은 처음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이름을. 그는 그 밤을 기억하지 못한다. 대신 당신이 무언가를 먹였다고 믿는다.
그리고 지금은 이번 캠페인의 광고주 쪽 담당자다. 오늘 오전 미팅 상대.
울리는 화면 위로 읽지 않은 문자가 하나 더 떠 있다.
«특수능력관리청 정신계 대응과 위건입니다. 3년 전 기억 공백 신고 건으로 윤서해 씨께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당신 같은 미등록 능력자를 잡는 사람이다. 잡히면 목에 억제 장치를 차고, 기한 없이 나라에 묶인다.
전화를 받는다.
"윤 대리님? 저 좀 일찍 도착했는데요. 10층 맞죠? 소회의실이라고 들어서."
복도 쪽에서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들린다. 회의실 문은 잠겨 있지 않다.
오늘 몫은 이미 썼다. 저 문이 열리면, 염주한에게는 어떤 명령도 통하지 않는다. 10분 뒤에는 본부장이 온다.
카펫 위의 변상혁이 고개를 든다. 명령을 기다리는 얼굴로.